Gun Ginoza's Dog

격월간 드림 웹진 《 Multiverse in Dream 》 03-04월호

지정AU : 캠퍼스물(대학 생활)

 

 

아무상관없는그림: 히새님



1.

 

때는 시험 기간. P대학 법학부 기노자 노부치카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몬스터에너지를 홀짝이면서,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면 들어서 머리를 쳐도 될 것 같은 두께의 전공 서적 내용을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시야도 정신도 흐릿하다. 도서관 소파마다 그와 크게 상태가 다르지 않은 대학생들이 산송장처럼 널브러져 있다. 그도 잠깐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저 소파 자리는 4년째 학교 다니면서도 시험 기간에 잡은 적이 없다. 대체 언제 비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자리라도 잡은 걸 다행으로 여긴다. 열람실 자리는 늘 모자라서 여차하면 학교 주변 24시간 카페나 스터디 카페에서 밤을 새워야 하니까. 취향에 따라 그쪽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카페는 음악이 방해되고 스터디 카페는 돈이 아깝다. 기노자는 아무래도 정돈된 학교 도서관에서 훨씬 집중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켠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 어느새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일자가 바뀌어 있다. 동시에 기노자는 알림창의 톡을 확인한다. 

[선배 도서관이죠]

세 시간 전에 받은 것이다. 발신인은 카즈키 레이지, 교양에서 조별 과제로 만난 1학년이다. 경영학부니 PPT는 자기가 만들겠다는 말에 전공생으로서의 수업 경험이 거의 없을 1학년한테 전공이 뭔 상관인지 생각했지만 그러라 했는데 결과물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이 제일 많다고 자연스럽게 발표를 맡은 기노자가 발표날 좀 깔끔하게 입고 왔더니 사진 찍게 해 달라고 매달려서 기어코 몇 장 찍어간 이상한 면모도 있지만.

[그래]
[아까 5층에서 자리 찾다가 봤어요]

칼 같은 답이다. 공부 안 하고 폰 만지나 본데. 주변을 둘러봤지만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데]
[3층 소파자리요]
[소파를 잡았어?]
[부럽죠 선배잠안와요?]
[졸려]
[내려와서 제 옆자리에 누우세요]
[1인용 소파 아닌가?]
[밀착하면 될 듯 몸을 완전히 겹치는 거죠]
[에타에 박제당하는 게 꿈인가?]
[좋네요... 선배랑 공공연한CC가 될 수 있다면]
[미친 건가?]

요즘 애들은 빠꾸가 없네…. 도끼눈으로 액정을 째려보던 기노자가 이어 도착한 답장에 헛웃음을 뱉었다.

[당신에게 미.침]
[그래 나도 미치겠구나.]
[농담입니다💗]

단톡에서나 조별로 모일 때는 아주 조용한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바보 같은 이야기나 하는 놈일 줄이야.

[시험은 언제 끝나요?]
[수요일]
[이틀 더 남았네요 오늘 밤새우세요?]
[그래야 돼]
[내일도요?]
[ㅇㅇ]
[선배통학하지않아요? 진짜피곤하겟다...]
[졸업하려면 죽어야지 별 수 있나]
[아니 죽으면 졸업을 못 하는데요;]

녀석이 멍청하게 우는 이모티콘 몇 개를 보내면 기노자도 갖고 있는 이모티콘 중에서 기절하는 이모티콘을 대충 연달아 보냈다.

[시험치고 제 방에서 주무실래요? 어차피 또 도서관 쓸 거면 집까지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이 녀석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던가. 기노자에게는 고마운 제안이긴 했다. 확실히 주변에서 잘 수 있다면 좀비가 된 몸을 이끌고 통학으로 왕복 세 시간씩 버리는 것보다 훨씬 편할 테니까.

[그래도 되나?]
[제가 감사하죠]
[대체 어느 부분이]

기노자는 조금 망설이던 손가락을 마저 움직여 묻는다. 어쩐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웃겼다.

[왜 그렇게 날 좋아하지?]

실시간으로 응답하던 녀석이 조용해진다. 답장은 5분의 침묵 뒤에야 간결하게 도착했다.

[얼굴]

실환가….

요즘 애들은 진짜 빠꾸가 없네…. 기노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화면을 끈다. 검은 액정에 제 얼굴이 비쳤다. 눈매가 싫어서 쓰고 다니는 안경을 괜히 한 번 고쳐쓰고는 다시 전공책에 시선을 고정한다.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환기가 안 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도서관이 약간 더웠다.



2.


기노자가 도서관에서 밤을 새운 뒤 시험 두 개를 연달아 치고 나오자 열두 시였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눈 먼저 붙이고 싶어 녀석이 보내준 주소에 도착한다. 들어선 곳은 대학가의 평범한 원룸이었다. 자취방 주인은 오후 시험이라 네 시에야 들어올 것 같다고 했다. 책상 쪽엔 마스터키보드와 데스크탑, 게임기가 비치된 한편 매트리스 위에는 포켓몬 인형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럭저럭 정돈된 방이지만 의자에 바람막이와 과잠을 대충 겹쳐서 걸쳐 놨다거나 하는 생활감도 있다.

[잘 도착했다 고마워. 욕실 좀 써도 되나? 안 씻고 매트리스 쓰기도 미안해서.]
[아 네넵 편한옷 아무거나 꺼내입으셔도 되구요 로션도쓰시고 밥도있으니까 제 다이어리만 열지 마시고 아무거나 하십쇼]
[그렇게 말하니까 다이어리가 제일 보고 싶군]
[매일매일 선배 스토킹한 기록이 궁금하면 봐도 됩니다🙂]
[진짜 보기 싫어졌어]

멍청한 톡을 주고받고 있으면 늘 그렇듯 헛웃음이 났다. 욕실을 쓴 기노자는 이왕 허락받았으니 티셔츠와 트레이닝 반바지를 빌려 입었다. 화장대는 따로 없고 책상 한쪽에 기초 화장품 몇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 사이로 향수병 몇 개가 눈에 띄었다. 평소 향기의 정체가 이것들이군. 매트리스에 몸을 누이자 이불에서도 익숙한 향이 났다. 자기 전에도 열심히 뿌리나 본데… 현실적인 추론을 하고 있자면 솜으로 만들어진 라이츄와 눈이 마주친다. 기노자는 라이츄 인형의 은은한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3.


삑. 삑삑삑삑. 도어락 버튼음과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노자는 눈을 떴다. 멍한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시야에 방 주인이 나타난다.

"선배 이불 덮고 있으니까 애벌레 같고 귀엽네요."
"뭐? 뭔…."
"슬슬 민증검사도 안 할 나이가 올 텐데 저라면 그냥 고맙다고 할 겁니다."
"벌레 취급에 감사하라고?"
"아니 귀엽다는 말에요."
"눈물 나게 고맙다 그래."

기노자가 느리게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댔다. 카즈키 레이지는 살짝 품이 큰 자기 옷을 입은 채 평소와 달리 안경 벗고 갓 잠에서 깨어나 약간 따끈하고 멍한 남자를 계속 눈에 담고 있으면 제가 스물의 혈기를 핑계로 남의 성적자기결정권을 해하는 미친 일을 저지를까 봐 알아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너 시간 주무신 거죠? 좀 더 주무세요."
"아냐, 너도 자야지."
"전 어제 도서관 소파에서 여덟 시간 자서 괜찮은데요."
"그 정도면 숙박한 거 아니냐…. 근데 배고프다."
"제가 뭐 대단한 요리는 못 해서… 배달시킬까요?"
"내가 사지. 방도 빌렸으니까."
"그럼 사양 안 하죠. 선배가 먹고 싶은 거로 시켜주세요."
"마라탕 3단계랑 엽떡 5단계."
"그러십쇼 시험도 치기 싫고 먹고 죽읍시다 우리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인데 괜히 K캠퍼스AU 하다가 죽어보자고요."
"싫어. 빵으로 할 거다."
"그럼 피자 어때요."
"내가 먹고 싶은 거로 하라면서 자기 의견 피력하는군."
"아 맞다."

하여간 기노자가 배달앱을 두들기는 동안 씻고 나온 방 주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같은 이불을 덮고 나란히 벽에 기대앉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왜 은근슬쩍 치대는 거지? 기노자는 무거워진 어깨에 자연스럽게 툭 얹힌 머리통을 째려본다.

"뭐야."
"응."
"뭐냐고."
"응…."
"말을 말자."

대화를 시도한 게 잘못이지… 기노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기도 마주 기대서 무게를 실어주었다. 좋은 의미로 자기 객관화가 덜 돼서 다소 하하버스에 사는 감이 있는 그 남자는 그게 포상인 줄 몰랐으니까….

"포켓몬이 좋나?"
"네. 귀엽죠… 제 친구예요."
"바보처럼 생겼어."
"선배는 그렇게 말해놓고 제 생일에 라이츄 굿즈 사줄 것 같은 이미지군요."
"뭘 기대하는 거냐? 어이가 없군."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 기노자는 미묘하게 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언제 이까지 넘어왔지? 자고 가라는 말에…. 통상의 자신이었다면 아무리 편리하다 한들 남의 집에 신세 진단 사실이 더 불편해서 사양했을 거다.

"키보드도 치나 봐."
"작곡용인데 어릴 때 학원 가서 피아노 좀 배운 거고 허접이에요. 저건 인테리어로 전락했구요…."
"참 나. 게임도 많네."
"선배는 게임 안 하시죠."
"어, 그다지. 저게 네가 매번 뿌리는 향수인가?"
"보야지 데르메스."

이 녀석의 취향은 저와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간단히 잊을 것 같진 않다. 기노자는 본래 세심하고 머리가 좋다. 그러니까 한 번 알아차린 사실이 쉽게 잊히지 않는 건 당연하고, 기노자가 누군가에 대해 구태여 파악하는 시점이 곧 그의 영역에 받아들여진 시점인 것을 둘 다 어렴풋이 알았다.



4.


식사하는 동안 열람실 자리 예약을 마친 둘은 저녁쯤 다시 도서관으로 떠났다. 당연하지만 이 기간의 열람실 예약은 티켓팅이나 다름없어서 이번에도 같은 층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그냥 자기 집에서 같이 공부하면 안 되냐는 카즈키의 말에 네가 아까처럼 달라붙어서 집중이 안 될 거라고 일갈한 기노자는 망령 같은 얼굴로 기계처럼 형광펜을 그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가 톡톡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돌아보자 예상한 얼굴이 있었다. 불쑥 입에 초콜릿을 가져다 대는 서슬에 저도 모르게 받아먹는다. 녀석은 그 뒤로도 떠나지 않고 기노자의 곁을 기웃거렸다. 딱 봐도 공부하기 싫고 심심한 것 같다.

[뭐 하냐]

라고 노트에 적어 보이자 남의 필통을 뒤적여 펜을 든 카즈키가 기노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말을 이어 적는다. 

[너무지겨운데우리딱10분만산책해요 혹시 제가 흐름끊은거면꺼질게요]

'산책'이라는 두 글자를 가만 바라보던 기노자가 적었다.

[너 개 같네]
[그래도 사람한텐 보통 강아지 같다고 해주지 않나요?]

녀석을 가만 흘기다 '개'에 강조하듯 동그라미를 친 기노자는 못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어둠이 내린 저녁, 자판기에서 캔을 뽑아 들고 도서관 주변을 걷는다.

"내일도 시험 끝나면 자고 가세요."
"아니, 내일은 완전히 시험이 끝나니까 내 집에 가서 자면 된다. 이틀 연속 폐 끼치지는 않아."
"그래도 하굣길 피곤하시지 않나. 별로 폐도 아닌데요."
"지하철에서 눈 붙이면 되지. 그땐 출퇴근 시간도 아니어서 자리도 많으니까."
"……."

무슨 말을 해도 곧잘 받아치는 녀석이 조용해졌다. 왜 좋아하냐는 말에 [얼굴]이라고 답장하기 전 5분간 있었던 메신저의 정적 같다. 가로등 바로 아래 선 두 사람의 그림자는 짧다. 이런 조명은 꼭 중요한 독백을 종용하는 느낌이라 기노자도 밤바람을 맞으며 재촉 없이 기다리고 섰다. 마침내 카즈키가 입을 연다.

"그냥, 적당히 의도 파악해 주시면 안 될까요……."

늘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주제에, 이쪽을 못 쳐다보며 말끝을 흐리는 꼴은 답지 않다. 하지만 가산점을 주지. 한마디가 더 이어질 것 같은 타이밍에 기노자는 들고 있던 차가운 캔을 녀석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저 선배 좋, 흐억,"
"생각해 보고."

관계의 흐름이 어떻게 될 지야 사실 뻔했다. 그렇지만 기노자는 마냥 호락호락한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녀석의 머뭇거림에 만족했다. 그러니까… 너무 기어 오르지 마라. 더 전전긍긍하도록 해.

기노자의 상대로서 카즈키 레이지의 장점이 있다면 실제로 그는 개 같아서 주인 될 사람이 하달하는 무언의 명령을 잘 파악한단 것이다. 와닿은 냉기와 반대로 열 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몇 걸음 앞서 도서관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기노자의 뒤를 얌전히 따른다.



5.


시험을 마치고 카즈키가 핸드폰을 켜자 기노자로부터 사진 한 장이 전송되어 있었다.

Ϟ(๑⚈ ․̫ ⚈๑)∩

제 방의 라이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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